월간바둑

인간계 최후의 전사 이세돌

등록일
2020-03-25
조회수
412
▲ 인간계 최후의 전사 이세돌. 비금도 섬 독수리의 비상을 월간바둑 3월호 특별기획으로 다뤘다.

특별기획/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7편 이세돌(上)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인간계 최후의 전사 이세돌
-섬 독수리의 비상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시운이 불리하니 말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구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난들 어쩌랴.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을까 .”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전장에서 물러나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항우는 이렇게 탄식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소년장사로 봉기해 70여 회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 그였지만 사태가 기울어진 순간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스스로 고독을 자초했기에 마지막까지 그를 지킨 것은 아끼는 말 한 필과 사랑하는 여인뿐이었다.

항우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오강에 이르렀을 때 배 한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영웅됨을 흠모했던 뱃사공은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며 배에 오를 것을 재촉했다. 항우는 정중히 호의를 거절했다. 뛰어난 행위예술가가 마지막 장면에서 최고조의 연기를 뽐내듯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더 높이 무기를 들어올렸다. 끝은 자결이었다.   

항우처럼 일생에 걸쳐 강함의 길만을 걸어온 사람에게 연민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민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죽으면 최소한 체면은 건질 수 있다.      

이세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는 ‘지고는 못 사는’ 타입의 전형이다. 최정상권 스타 중에서도 그의 자부심은 특히나 유별나다. 19세에 세계를 향한 비상을 시작한 뒤 삼십이 넘도록  그의 자존감은 꾸준히 고공비행을 계속해왔다. 그것이 알파고로 인해 무너졌다. 얄궂게도 인간을 대표하는 전사로 한 판을 이긴 다음 그는 더욱 절망감을 느꼈다.

기계에게 배우고, 후학들에게 밟히며 사는 삶은 그에게는 죽기보다 더한 치욕을 의미했다. 자결하듯 전부를 내려놓았다. 그것이 이세돌식의, 이세돌이 지키고자 한 마지막 품격이었다.




이세돌(1983~)
- 1983년 전남 신안군 출생
- 1995년 입단(12세). 국내 두 번째 형제기사(이상훈 九단의 친동생)
- 2000년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생애 첫 타이틀). 32연승 기록
- 2002년 후지쓰배 우승(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 이후 통산 3회)
- 2003년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이후 통산 2회). 九단 승단
- 2004년 삼성화재배 우승(이후 통산 4회).
- 2005년, 2007년 도요타덴소배 2회 연속 우승
- 2009년 6월 휴직. 그해 12월 복귀. 
- 2010년, 2011년 비씨카드배 2회 연속 우승. 
- 2014년 1~9월 중국 구리 九단과 10번기(6승2패로 승리). 연간 최다획득 상금(14억) 
- 2016년 3월 ‘알파고’와 대결(1승4패)
- 2019년 11월 은퇴 발표. 12월에 인공지능 ‘한돌’과 은퇴기(1승2패)
  <통산 타이틀 획득 50회. 세계대회 18회 우승. 최우수기사상 7회>


다시 비금도 얘기를 시작한다. 이세돌의 출발점이자 이세돌로 인해 유명해진 그곳. 아들의 마지막 은퇴기를 보러 가기 위해 칠순의 노모가 칼바람을 맞으며 배를 기다렸을 그곳. 

언제쯤일까. 대략 10여 년 전에 이세돌 스토리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이었고, 그때도 시작은 비금도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성공 스토리를 썼고 지금은 은퇴 스토리를 쓰고 있다는 것. 원래가 무상한 세월이지만, 격세의 느낌이 더해지면서 마음 한구석이 자꾸 시려만 가는 것은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일까. 
그 사이 비금도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이세돌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몇 년 전부터는 이세돌의 둘째형(차돌)이 고향에 내려와 바둑을 가르친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릴 적 세돌이 뛰놀던 바닷가에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들어섰다는 뉴스도 있고. 정작 들리지 않는 것은 이 섬의 주인공에 관한 얘기뿐이다. 비금도의 전설은 여기서 끝나는 걸까. 


▲ 3남2녀 중 막내였던 이세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독수리가 나는 섬

‘천사(1004)의 섬’이라는 브랜드가 말해 주듯 전라남도 신안군에는 천개가 넘는 섬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배들의 왕래가 잦은(사람들이 많이 사는) 섬은 그리 많지가 않다. 목포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비금도는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큰 섬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목포항에서 출발하는 4곳 큰 섬 중의 하나였다.

해안선의 길이가 거의 100km에 이르는 너른 섬답게 사방엔 논밭이 펼쳐져 있고, 주된 산업도 어업이 아닌 농업이다. 이세돌의 부모 역시 이곳에서 과수나 논밭을 일구며 살았다.  

이세돌은 이 비금도에서 1983년 3월 2일 아버지 이수오 씨(98년 작고)와 어머니 박양례 씨(72)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8살 위인 큰 형이 프로기사 이상훈 九단이고, 7살 위인 둘째누나가 월간『바둑』 편집장을 지낸 이세나 씨이다. 그밖의 형제들도 수준급 바둑 실력을 지닌 바둑가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섬 이름에서 ‘비금(飛禽)’은 ‘독수리가 날아다닌다’는 뜻이다(그런 섬의 모습을 상징하듯 쾌속선이 드나드는 항구에는 커다란 독수리 형상이 세워져 있다). 아울러 전라도 지역에서 천일염전이 처음 시작되었던 섬은 소금값이 금값일 때는 ‘돈이 날아다닌다’는 뜻의 비금(飛金)으로도 통했다.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한때는 돈이 넘쳐났던 곳. 이런 곳에서 장차 세상을 뒤엎을 운명을 지닌 어린 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저 우연이기만 한 걸까.  

이름부터가 조금 별나긴 했다. 교사 출신으로 언어학, 천문학 등에 밝았던 아버지 이수오 씨는 마흔에 얻은 늦둥이에게 ‘세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알려진 바와 달리 세돌은 순수한 한글 이름이라고 한다(세돌의 바로 위 형의 이름이 ‘차돌’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세’자와 ‘돌’자에 특별한 애착을 느끼셨다. 일부에서 ‘돌(바둑돌)로 세상을 제패하라는’ 뜻에서 지어줬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누나 세나 씨는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세(世), 돌 돌(乭)’로 이해하며 바둑과 연관지어 말하길 좋아하지만.


▲ 어린 시절 누나 이세나에게 바둑을 배우는 세돌·차돌 형제.


#춤추기를 좋아했던 막내둥이   

비금도는 깨끗한 바다, 병풍 같은 기암절벽과 해송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섬이다. 너른 편이라고 했지만 엄청난 정도는 아니다. 섬 중심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어디서든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세돌은 그런 바다를 보며 자랐다. 딱히 놀 것이 없는 섬에서 바닷가가 천혜의 놀이터가 됐다.

사시사철, 혹독한 겨울바람이 몰아쳐도 어김없이 바닷가를 왕복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몸으로 형들과 ‘누가 빨리 가나’를 내기하며 정신없이 내달렸다. 사방을 두르고 있는 논과 밭 그리고 그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 마음이 탁 트였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는 때때로 거친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드넓고 푸른 자유로움을 더 많이 보여준다. 훗날의 이세돌을 특징짓는 자유로운 발상이 도시와는 전혀 다른 이런 환경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추측이 어렵지 않은 대목이다. 가끔은 그것이 지나쳐 ‘건방지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누가 막내 아니랄까봐, 말도 못하는 개구쟁이였다. 크고 작은 말썽을 피웠다. 다섯 살 때 크게 화상을 입었다. 방안에서 뛰놀다가 뜨거운 개장국 그릇에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엉덩이를 심하게 데어 몇 달을 고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부모는 늘 세돌을 귀여워했고 형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녁때 농사일에 지친 부모가 돌아오면 그 앞에서 새로운 춤을 개발했다면서 멋진(?) 댄스를 뽐냈다. 말도 안 되는 막춤이었지만 박장대소하는 부모님 얼굴을 보는 게 정말 좋았다.

자신보다 8살 위인 이창호가 뚱뚱한 몸집으로 스승의 타이틀에 도전하던 그 시절, 세돌은 이렇게 매일 춤을 추며 놀았다. “요즘 시대라면 아이돌 가수나 댄서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이세돌은 이렇게 말하며 피식 웃곤 한다. 


▲ 95년 비금도 고향집에서 가족과 함께 한 이세돌. 왼쪽은 큰형 이상훈 九단.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어느 분야든 천재가 그 재능을 활짝 꽃피워 대성하기까지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우연히 대가의 눈에 띄는 경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흔한 스토리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대부분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인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영등포 저잣거리를 배회하며 스스로 바둑을 깨우친 서봉수처럼 예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후자가 압도적이다. 외딴섬 비금도에서 자란 이세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세돌의 삶에서 지금도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다. 한글보다 바둑을 먼저 가르친 스승도 아버지였고, 그가 바둑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작고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이세돌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세돌의 아버지(이수오 씨)는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교편을 잡았던 교육자였다. 세돌이 태어날 즈음 여러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교육자 기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섬 아이들을 모아놓고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고, 비금도 고유의 문화, 독특한 사투리와 억양 등을 연구해 사전을 만들겠다고 농사일로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공을 들였다. 이세돌은 “그런 아버지의 지적 호기심과 머릿속에서 관심 분야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 기질을 자신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세돌의 아버지는 워낙 바둑을 좋아했고 또 잘 뒀다. 당연히 자식들에게 바둑을 가르쳤고, 그 중 실력이 출중했던 큰형 상훈은 세돌이 다섯 살 때인 10대 초반에 프로기사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세돌도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뛰어노는 게 더 좋았다. 억지로 무릎에 앉히려는 누나에게 싫다면서 발버둥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놀라운 변화가 왔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바둑, 특히 따먹기에 흥미가 붙기 시작했다. 일단 빠져들자 바둑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승부욕을 자극시키는 흥미진진한 게임이 됐다. 시작은 늦었지만 한 명 두 명 일찍 시작한 형제들을 따돌렸고 가장 높은 급수였던 둘째형(차돌)을 이기는 데까지는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돌을 제대로 가르쳐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때였다. 형 차돌은 세돌에게 추월당하면서 공부로 전환해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외딴섬이었다. 교재라고 해봐야 월간『바둑』이 전부였다. 자연 아버지와의 실전이 공부의 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지도 방식은 독특했다. 아침에 농사일을 나가면서 바둑판 네 귀퉁이에 묘수풀이를 서너 개 내주었다. 그리고 일을 하다가 이쯤이면 풀었겠지 싶을 때 결과를 물어봤다. 이런 식으로 <기경중묘>부터 어려운 <발양론>까지 몇 번을 돌면서 고전사활을 마스터했다. 나중에는 문제만 봐도 슬슬 답이 나올 정도였다. 바둑을 하니 산수는 곱셈까지 절로 트였다. 한글은 여덟 살이 되어서야 겨우 깨쳤다.



▲ 꼬마 이세돌의 등장은 화제였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전국어린이바둑대회에서 자신보다 서너 살 위의 누나 형들을 꺾고 우승해 일찍부터 천재소년으로 주목을 받았다. 제1회 문체부장관배 국민학생부 결승(위 사진)에서는 세 살 위인 하호정에게 패했지만, 제12회 해태배 결승(아래 사진)에서는 네 살 위의 한종진을 꺾고 우승했다.


#벌벌 떨면서 먹었던 초코파이

1989년, 조훈현 九단이 중국의 네웨이핑을 꺾고 응씨배에서 우승했다. 세상이 난리가 난 듯했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눈을 뜨면 바둑 얘기뿐이었다. 이때 TV에서 본 조훈현의 모습이 일곱 살 세돌의 삶을 바꿔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 바둑은 그저 재미난 놀이에 불과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프로기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올라간 큰형 상훈도 아직 입단을 못했을 때였다. 그때부터 조훈현은 세돌의 롤모델이자 우상이 되었다. 따라한 건 아니지만 스타일도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다행히 이듬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열여섯 살이던 형 상훈이 프로기사로 입단에 성공했다. 수입이 생기면서 세돌이 서울로 올라가도 돌볼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홉 살 무렵 세돌은 서울로 올라와 형이 사범으로 있던 권갑룡 도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 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아버지는 세돌을 데리고 어린이대회를 찾아 나섰다. 세돌의 집은 원래 과수 1,500평 정도로 넉넉한 편이었으나 그후 자녀들의 학비 지출이 많아지면서 이 무렵에는 말도 못하게 살림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런 형편에 도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 번 나가면 며칠씩 머물러야 했으니 숙박비도 부담이었고, 시합할 때면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며 돈을 아끼지 않았으니 식비 지출도 컸다. 세돌은 그때 중국집에서 먹던 짬뽕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사실 대회 출전할 때 지불한 돈은 다 빚이었다. 빚을 내서 대회에 나갔다가 상금을 받으면 그걸로 빚을 갚는 식이었다. 1학년 때 어린이대회에서 2부리그에 해당하는 을조에 나가서 우승을 하고, 2학년 때는 1부리그인 갑조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아버지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오리온배 어린이바둑대회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물론 그때도 빚을 내서 나갔다. 지면 큰일이라는 것은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이 첫 대국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책 없이 빨리 둔 탓이었다. 이미 다른 대회에서도 우승한 전력이 있고, 이 대회에서도 우승하고도 남을 실력이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세돌의 아버지는 어지간해선 매를 들지 않았다. 정말 맞을 만하다 싶을 정도로 잘못한 때만 살짝 매를 들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세돌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 나게 맞았다. 

세돌은 초코파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매를 들기 전 아버지는 초코파이부터 주었다.

“일단 먹어라. 맞을 때 맞더라도 일단 먹고 맞아야 하지 않겠나.”

맞는 건 어차피 맞는 거였다. 벌벌 떨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인 채로 초코파이를 다 먹었다. 그리고 나서 매타작이 시작됐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왜 맞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세돌은 원망하지 않았다. 나중에 도장에 들어가 매를 맞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찝찝하게 넘어가느니 차라리 시원하게 맞는 편이 후련하다고 생각했다. 



▲ 될성부른 떡잎으로 주목 받았던 이세돌이 1995년 조한승과 함께 입단했다. 12세 입단은 조훈현(9세), 이창호(11세)에 이은 역대 최연소 세 번째였다.


#‘리틀 조훈현’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도장에 형이 있어 든든했지만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세돌은 도장에서 가장 막내였다. 한 살이 됐든 열 살이 됐든 주변은 모두 형과 누나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또래 친구가 없었다. 도장에서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어마어마하게 말썽을 부렸고, 그 바람에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권갑용 八단은 어린 세돌의 말썽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할 때가 많았다. 권八단은 “세돌이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천재적인 승부호흡을 보여줬다. 특히 상대와 부딪힐 때 물러서지 않고 격렬히 맞서 싸우는 게 세돌이의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그런 개성을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품안의 보물이 행여 산산조각 나지 않을까 두렵고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11세 때인 1994년 처음 입단대회에 나갔지만 최종 관문에서 반집패했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95년 12세의 나이로 마침내 입단에 성공했다. 조훈현(9세), 이창호(11세)에 이어 세 번째 최연소 기록이었다.

동생이 입단한 지 며칠 안 되어 형 상훈은 군에 입대했다. 열여섯에 프로가 됐고 거친 파괴력을 지닌 싸움바둑으로 유망주로 떠오른 상훈이었지만 동갑내기로 저 유명한 이창호가 버티고 있었다. 이창호란 존재는 상훈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왔고, 상훈은 “나는 기재가 부족하다. 그러나 내 동생 세돌이는 다를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군에 입대해 버렸다. 상훈은 점점 잊혀졌지만 바로 이 한마디 때문에 ‘세돌’이라는 이름은 바둑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았다.

세돌은 프로가 되자마자 조훈현 九단과 공개 시험대국을 가졌는데 정선으로 두어 승부는 ‘빅’이었다. 조 九단은 대국 후 ‘훌륭한 재목’이라고 감탄하면서 이창호 스타일과 전혀 다른, 자신의 스타일과 아주 흡사한 이세돌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리틀 조훈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천재’라는 소문과 함께 출발한 이세돌은 사람들의 부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1995년에 7승7패(50%)
1996년에 32승21패(60.4%)
1997년에 55승21패(71.4%)


성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예선에서 거둔 것이었다. 결정적인 게 없었다. ‘그저 그런 신예’라는 평가가 나왔다. 형이 없는 공허감에 오락실도 다니고 만화방도 다니면서 허송세월을 했다. 입단 후 3년이 그렇게 정체된 채 흘러갔다. 훗날 이세돌이 “너무 아쉽고 후회가 된다.”고 말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몸 상태도 나빠졌다. 스트레스성이었다. 기관지에 염증이 생겼다. 실어증 수준으로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세돌은 아무 것도 몰랐다. 부모님은 신안에 계셨고 보호자 역할을 했던 형은 입대한 상태였다. 치료시기를 놓쳤고 기관지 신경은 마비됐다. 한번 변한 목소리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즈음 그렇게 해서 생겼다.


▲ 천재소년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세돌이 입단 6년차이던 2000년 드디어 질주를 시작했다. ‘불패 소년’으로 불리며 32연승을 기록한 이세돌은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으로 자신의 첫 타이틀을 장식한 데 이어 6월 제1기 KTF배 결승(사진)에서 유창혁을 2-1로 꺾고 2관왕에 올랐다.  


▲ 32연승을 질주한 그해 이세돌은 다승 연승 최다대국 부문에서 1위를 기록, 연말 열린 바둑대상(당시 바둑문화상)에서 이창호를 제치고 MVP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승부사로의 변신

중학교 3학년이었던 열여섯 살 때 이름만 올라 있던 학교를 자퇴했다. 바둑과 학업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바둑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못했던 상태였다.

이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만 55세의 이른 나이, 세돌에겐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이었다. 교사의 꿈을 자식을 가르치는 걸로 대신했던 아버지였다. 평소에 “우리 막둥이 타이틀 하나 따는 것 보고 가자.”를 입버릇처럼 말했던 아버지였다. 

1년 정도 지나 충격이 가시자 없던 독기가 생겨났다. 천진난만한 이세돌은 그때부터 사라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살아계실 때 잘 좀 했으면 좋았을 걸.’ 후회와 죄송스러움이 뒤섞일 때마다 강렬한 승부욕과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프로 입단 6년째 되는 2000년, 질주가 시작됐다. 5개월에 걸친 경기에서 32연승을 거두며 ‘불패 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생에 첫 타이틀을 따냈고, 연말엔 유창혁 九단을 꺾고 배달왕기전까지 우승했다. 1인자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딴 것은 아니지만 이세돌은 단숨에 2개의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해에 이창호의 6년 독주를 저지하며 MVP가 된 세돌은 최다승 1위(75승20패), 연승 1위(32연승), 최다대국 1위(95국)를 기록하며 모두가 주목하는 황태자의 반열에 올랐다. 비금도의 섬 독수리가 힘찬 비상을 시작한 것이다.


▲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열린 LG배는 이세돌의 광풍이 휘몰아친 대회였다. 불패 소년 이세돌이 결승까지 치고올라와 이창호와 세대교체를 내건 한 판 승부를 펼쳤다. 결승1, 2국은 예상을 뒤엎는 이세돌의 완승. 하지만 결승3국에서 다 잡았던 승리를 순간 방심으로 놓치며 결국 3연패로 패퇴. 인터뷰 때 아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이세돌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처음, 바둑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

2000년부터 시작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는 이듬해인 2001년 초까지 이어졌다. 새해가 열리자마자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에서 중국의 1인자 저우허양 八단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난공불락의 1인자 이창호 九단. 이세돌은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자신감으로 무장돼 있었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은 싸늘했다. 겨우 三단에 불과한 18세의 이세돌이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26세의 이창호를 이길 리 없다고 입을 모았다.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어린 비둘기는 재를 넘기 힘들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다시 회자됐다.

하지만 2월 26일 벌어진 결승 첫판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이창호 九단의 대마가 죽어 버렸다. 126수 만에 백을 쥔 이세돌이 불계승을 거둔 것이다. 깜짝 놀란 시선들이 이튿날 벌어진 2국에 집중됐지만 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이세돌의 연이은 단명 불계승. 천하의 이창호가 번기에서 0-2로 몰리는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이때 바로 3국이 열렸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당시 LG배 결승은 5번기였고 두 차례에 나뉘어 진행됐다. 1차 라운드로 1-2국을 치르고, 시차를 두고 열리는 2차 라운드서 나머지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다. 1차 대회가 끝나고 77일 만에 2차대회가 속행된 시차가 결과적으로 극적 반전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세돌이 유리했던 3국을 진 것이 상처가 됐다. 뭔가에 홀린 듯 역전패를 당한 다음 내리 세 판을 내주고 말았다. 이세돌은 지금도 그 3국을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대국으로 꼽는다. 자서전 ‘판을 엎어라’에서 그는 “마지막 진 그날 밤 처음 울었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때의 결승전은 이후 길게 이어지는 이-이 대결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세돌에게는 설욕의 무대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년 뒤인 2003년, LG배 결승에서 이세돌은 이창호와 다시 마주 앉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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