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바둑

특별기획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2편 김인(上)

등록일
2019-03-21
조회수
337
▲ 영원한 국수 김인 九단.

특별기획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2편 김인(上)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영원한 국수 김인
- 청산(靑山)은 말이 없다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이 산이다.
산은 사시사철 풍파를 겪어도 의연하다. 그래야 산이다.
산은 심신이 지쳐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이 산의 정신이다.
산은 청빈하다. 언제든 꽃과 열매와 과실을 내어줄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산의 태도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청산(靑山)’이라 부른다. 늘 푸른 산처럼 변함없이 육십 년을 지키고 선 사람.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커다란 산 같은 사람. 그것이 김인이다.   


“조선생 시간을 재겠습니다. 30초….” 대국장은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40초-50초-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딱!” 불리한 형세를 타개하려고 반상을 응시하던 조남철 八단이 시간에 쫓겨 바둑돌을 놓았다.

“지금 내 시간 몇 분 남았지요?” “9분입니다.” “이제 다 두었군.” 입회한 한국기원 부이사장 배상연의 말. “반면으로 백이 남지요? 한 집입니까?” “두 집이군요.” 덤을 합쳐서 백의 6집반승. 김 五단은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후략)



 


▲ 1962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난 김인은 이듬해 말 귀국해 조남철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김인 시대’를 열었다. 국수전 10기 도전기에서 조남철의 10연패를 저지한 김인(왼쪽)은 이후 15기까지 6연패를 달성한다.


6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은 ‘새 국수에 김인 五단, 조남철 기성(碁城) 10년 만에 붕괴’란 특호 제목 아래 흥분된 필치로 이 뉴스를 전했다. 최종국 총보와 함께 5단 크기의 지면을 할애해 대서특필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3면 사회면엔 ‘7시간의 각축’이란 제목으로 1면 기사의 3배에 달하는 해설 기사가 별도로 실렸다.

바둑 관련 기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이처럼 1면과 사회면 톱을 장식한 경우는 이 10기 국수전이 최초였다.


당시 나이는 조남철 43세, 김인 23세. 해맑은 얼굴을 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영원불멸일 것 같았던 조남철을 꺾었다는 뉴스는 이내 전국으로 퍼져나가 바둑을 전혀 모르던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화제가 됐다. 한국 현대바둑사 최초의 반란이자 전대미문의 혁명적인 사건. 김인이 일인자로 등극한 순간은 이렇듯 천지가 흔들리면서도 화려했다.  
 




# 바둑판을 끌어안고 홀로 야간열차를 탄 소년
유홍준이 ‘남도답사 1번지’로 지목한 전라남도 강진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만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어디를 가나 완만한 풍경들이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고 지명(편안할 강康, 나루터 진津)이 말해주듯 소박하면서도 평화로운 포구의 일상이 느릿느릿 전개된다. 사시사철 맑은 하늘에 파란 바다가 넘실대고 신비한 푸른빛의 청자가 만들어진 곳. 김인은 이 강진에서 1943년 11월 23일에 태어났다.

기억하는 순간부터 주변에 늘 바둑판이 있었다는 걸 보면 바둑은 김인에게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강진 읍장을 지낸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바둑을 둘 줄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셋째형에게서 바둑을 배운 다음에는 바둑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열두 살 무렵의 어느 날, 소년 김인의 운명이 바둑으로 정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왔다.   

“여름방학 때 같은데, 여느 때처럼 도립병원을 지나 집에 가는 길이었다. 나무 그늘 밑에서 두 의사가 바둑을 두고 있길래 잠자코 구경했다. 처음에는 내가 있는 걸 몰랐던 한 의사가 나를 보더니 ‘바둑 둘 줄 아느냐’고 해 ‘그렇다’고 하자 한판 두자고 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나는 8, 9급 수준이었다. 신혼이던 그 의사와 관사에서 통금 직전까지 여러 차례 바둑을 두다가 아버님께 불려갔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아버님은 되레 강진에서 제일 잘 두는 ‘강진 국수’ 최경연 선생을 연결해줬다. 최 선생은 아마 초단쯤 되는 실력이었다. 당시는 바둑으로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아버님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바둑을 밀어줬는지….” 


이듬해 열세 살 때 아버지 친구의 권유와 아버지의 승낙으로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다. 그때가 1955년 3월. 당시 김인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집에 있던 바둑판을 고치고 칠을 해서 서울로 갖고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바둑판은 한 지인의 사무실에 뒀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소실됐다. 


▲ 조남철 국수보다 스무 살 아래인 김인의 등장은 한국바둑계에 단비와 같았다. 그러나 김인은 팬들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조남철 국수에게 패퇴하고 만다. 조남철을 넘기에는 아직 미완이었다. 사진은 김인의 중학생 시절 모습.


혈혈단신 서울로 온 김인은 명동의 송원기원에 나가면서 제대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대의 실력자 김봉선과 전설적인 아마 고수 이학진(1911~2009·구한말 의친왕의 사위)이 소년의 성장을 도왔다. 당시 송원기원은 나이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소년으로서는 김인이 유일했다. 처음 6급으로 시작해 단기간에 1급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런 다음 상경 3년 반 만인 1958년, 15세(당시만 해도 깜짝 놀랄 만 한 어린 나이였다)의 나이로 입단하면서 김인은 모두가 주목하는 기린아로 우뚝 서게 된다. 

김인에 대한 기대는 컸다. 조남철의 일인 독주를 저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61년, 19세의 김인이 6기 국수전의 도전자가 되자 사람들은 젊음의 패기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하지만 조남철의 벽은 높았다. 김인은 내용으로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승부로는 1승만을 건진 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국수전 도중 유학 얘기가 나왔고, 국수전이 끝난 지 4일 만의 도일(渡日)이었다. 주위에서는 의아한 눈길을 보냈지만 김인으로선 꼭 해보고 싶었던 도전이었다.  

“당시 주변에서 흔히 듣던 말은 ‘네가 성적을 내고는 있지만 일본 원생 최고수준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얘기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기보로는 일본바둑을 알고 있지만 실전을 두지 못했으니 한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 조남철의 1인독주를 저지할 기사는 없는 것일까? 제6기 국수전 도전자로 ‘열혈청년’ 김인 四단이 나섰지만 조남철 국수를 꺾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1승3패(1무)로 김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 “나는 유학생이 아니었다”
김인의 도일 유학 과정에서 조남철은 큰 인물다운 살뜰한 배려를 보여준다. 자신의 재일시절 스승이었던 기타니(木谷實)에게 김인을 잘 거두어 달라는 편지를 쥐어 보낸 것이다. 하지만 김인은 어찌된 일인지 기타니 도장에 바로 가지 못하고 먼 친척집에서 머물며 시간을 허송하게 된다(“연락 관계가 문제가 있었다.”고 김인은 짧게 당시를 술회했다).

김인의 친척은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는 연줄을 동원해 이웃에 사는 프로기사를 연결시켜 주었는데 고스기라는 그 四단의 태도가 기가 막혔다. “지인의 부탁이고 하니 내 특별히 힘을 써서 일본기원 원생으로 넣어주겠다”는 말로 김인을 얕잡아 보며 모욕을 줬다. 결국 이후에 김인이 조남철이 건넨 편지를 친척에게 내보이면서 기타니 도장과 연락이 닿게 되지만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후의 얘기는 잘 알려진 대로다. 하늘같은 권위의 기타니 문하에 발을 들인 김인은 여러 차례의 시험기와 단위 사정(査定) 대국을 거쳐 대뜸 三단을 인허 받는다. 한국에선 四단이었던 만큼 다소 기분 나쁜 일이 아닐까 싶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당시 일본기원의 입단대회를 통과하지 않고 면장을 받은 프로기사는 바둑의 전설 우칭위안(吳淸源) 九단이 유일했다. 한국의 청년 김인이 두 번째 사례가 된 것인데, 그런 이유로 일본기원 프로기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럴수록에 실력으로 보여주자고 김인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때 마침 바둑잡지 기도(棋道)에서 제안한 ‘아마추어 4대 천왕과 프로’간 이벤트 기전을 수락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 조치훈 도일 때 나리타공항에 마중나온 김인. 사진 오른쪽은 조치훈의 형 조상연.


이 무렵 김인은 도쿄 외곽의 하숙집에서 기타니 도장을 출퇴근하며 조치훈이나 고바야시 같은 어린 원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유학생 처지가 아니라 나이나 실력 면에서 당당한 수석 사범의 위치였다. 아울러 일본말이 조금씩 입에 붙으면서 말벗도 생겼다. 전철로 같이 출퇴근하면서 친해지게 된 다카키 쇼이치(高木祥一 九단. 작고)가 그였다. 다카키는 김인이 기도 주최의 이벤트 대국에 응한 것이 못내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오타케(大竹英雄)를 만났는데 그가 ‘나라면 그런 기획에 응하지 않았다. 지면 손해, 이겨야 본전인 그런 바둑을 왜 두느냐’고 하더군. 생각해봐, 말이 아마추어지 그 네 명은 프로 五단 실력이라고 평가받고 있잖아. 내 생각엔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것을 김인인들 몰랐을까. 하지만 이때의 김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내야 했고,  그런 무대가 필요했다. 기쿠치 야스로(菊池康郞), 무라카미 분쇼(村上文祥), 히라타 히로노리(平田博則)를 내리 꺾었다. 아쉽게도 하라다 미노루(原田實)에게는 패했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후로는 신문기전에도 나가고 승단대회에도 나갔다. 같은 또래 유망주들을 상대로 8할 전후의 승률을 올렸다. 김인은 기타니 도장에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김죽림(金竹林) 시대’라는 신조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김인과 오타케와 린하이펑(林海峰), 이 세 사람이 앞으로의 바둑계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 제13기 국수전 도전기를 끝내고 동아일보에서는 ‘린하이펑 초청 공개대국’을 개최했다. 김인 국수는 린하이펑 본인방과 1대1 무승부를 기록,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김인은 채 2년도 채우지 못하고, 1년 9개월 만인 63년 10월,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돌아온다. 표면상의 이유는 병역문제였지만, 빡빡한 일본식 도장 생활에 자유주의자인 그가 염증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일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배울 것도 없다는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 40연승, 승률 90% 육박...적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 1호이자 조남철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바둑을 체험하고 온 차세대 주자의 귀국이었다. 실력 업그레이드에 대한 기대감도 당연히 높았다. 동아일보가 앞장 서 김인 四단을 위한 ‘귀국 환영 5번기’ 행사를 열었다. 이창세 김재구 윤기현 민영현 김봉선이 나섰지만 김인에게 승점을 올린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 행사를 마친 후 김인은 군문에 입대했다. 처음엔 육군본부 근무중대에 배속 받았다가 나중엔 국회연락장교단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국회의원과 군 장교들의 바둑 상대를 하면서 시합에 출전할 수 있었다.  

65년, 김인은 마침내 10기 국수전 도전권을 거머쥔다. 도일 유학에서 돌아온 2년째인 이 해  김인의 성적표를 뒤져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26승3패(비공식 포함)로 무려 89.7%에 달하는 승률이었다. 그리하여 66년 1월 13일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도전5번기가 시작됐고, 김인은 2월 10일 최종 4국에서 조남철에게 승리하며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 66년 조남철을 2-1로 누르고 초대왕위에 오른 김인은 이후 7연속 우승을 포함 통산 8회 우승한다. 사진은 6기 도전기로 노영하 四단을 3-1로 꺾고 우승했다.




국수위 등정은 김인에겐 화려한 비상(飛上)의 신호탄이었다. 이 해에 왕위전이 생겼다. 국수전보다 컸으니, 한국에서 제일 큰 기전이었다. 김인은 결승전에서 조남철을 2대1로 꺾고 왕위전의 초대 챔피언의 영예도 차지했다. 나아가 2년 후엔 조남철의 최후의 보루였던 최고위 타이틀마저 수중에 넣으며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67년~68년 무렵 김인의 기량은 절정에 이르렀고,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김인은 7관왕에 올랐다. 전관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천하통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 무렵 김인은 연간 평균 90%에 육박하는 승률과 함께 눈부신 기록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67년에는 37승5패1무로 승률 88.1%, 68년에는 불멸의 최다 연승기록인 40연승과 더불어 50승7패로 승률 87.2%를 기록했다.

67년의 88.1%와 68년의 87.1%는 오늘날까지도 한국바둑의 통산승률 부분에서 2, 3위를 지키고 있다. 이창호 九단이 92년에 75승5패로 88.2%의 승률을 기록한 것이 역대 1위로 남아있지만, 2, 3위와 별반 차이가 없는 걸 보면 60년대 후반 김인의 위용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국수 6연패와 왕위 7연패(통산 8회)를 달성하며 제왕으로 군림한 김인이 77년까지 획득한 타이틀만 30개를 넘어섰다. 월간『바둑』엔 그의 얼굴이 화보를 장식했으며, 신문에서도 그의 이름은 언제나 나왔다. 조남철을 넘어선 그는 곧 한국바둑의 얼굴이 되었다.


▲ 74년 출범한 백남배는 김인의 열혈팬이 만든 기전이었다. 1기에서 김인은 정창현 六단을 꺾고 우승해 기대에 부응했다. 아래 사진은 시상식.




# 라이벌 없는 허전함... 술이 그 자리를 메웠다
프로기사든 운동선수든 최정상에 오르는 건 참으로 어렵다. 일인자가 된 후 그 자리를 지키는 건 더 어렵다. 한 시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했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경우는 대개가 남이 아닌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이다.

무적의 세월을 보내던 김인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중반부터다. 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9연패를 기록 중이던 조남철 九단을 꺾고 국수를 물려받았으니, 그의 독주 시대는 10년을 채우지 못한 셈이다. 호랑이로 군림하던 김인이 서른을 넘기면서 약해지는 기미를 보이자 조훈현을 필두로 서봉수, 김희중 등 새파란 20대 후배들이 사방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른바 춘추전국시대. 이 소용돌이에 김인은 7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 살 위 윤기현에게 국수 챔피언 벨트를 풀어준 다음, 2년 후에는 아성이었던 왕위마저 하찬석에게 넘겨주면서  시나브로 변방의 일개 성주로 전락하고 만다. 

더 나아갈 곳이 없는 일인자는 산의 꼭대기에 오른 등산가와 같다. 처음엔 정복의 벅찬 희열에 가슴이 떨렸지만 그 다음엔 막상 할 일이 없다. 목표 의식과 열정이 사라지면 남은 것은 내려가는 일뿐이다. 김인이 그랬다. 예술적 감수성이 특히 강한 그였기에 그런 현상이 더욱 빨리, 치명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자기관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오늘날의 프로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승리나 패배보다도 바둑의 본질이나 기도(棋道) 같은 것이 훨씬 중요했다. 비겁하거나 품위를 잃은 승부를 그는 극도로 혐오했다(훗날 KBS바둑왕전이 생겼을 때 김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뜨거운 조명 하에 콩 볶듯이 초를 읽는 환경에서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강철민과 부산에서 최고위전 타이틀전을 둘 때는 불과 80수 만에 돌을 던져 주위 모두를 경악시킨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2대 2 스코어에서 최종국이었다. 김인이 모양 나쁜 수를 두긴 했으나 형세가 기운 것도 아니고 돌을 던질 장면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나 그는 모양이 나빠지자 둘 맛을 잃었고 흔쾌히 돌을 던졌다. 상대 강철민이 오히려 놀라 “어, 이 사람 왜 이래? 어서 두어”라고 했다던가. 

전성기가 지나면서 김인은 승부에서 지는 일이 잦아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흠모하는 팬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74년 만들어진 백남(白南)배라는 타이틀전은 이듬해 김인이 타이틀을 잃자마자 곧 없어져 버렸다. 대회의 스폰서인 모 대학 이사장 K씨가 오직 김인만을 위해 만들었던 기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인은 결벽처럼 악착스러운 승부를 싫어했고 과정이 멋진 승부를 선호했다. 그는 엄밀히 말할 때 허구를 좆는 병법가였고, 비정한 승부를 외면한 로맨티스트였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 ‘장이’였다. 이런 스타일의 김인이 정상에 올라 더 이상의 목표를 찾지 못하게 되자 술과 더불어 인생을 흠뻑 적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의 시대는 조훈현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저물게 된다.                         

 <2편에서 계속> 

김 인(1943~)
-1943년 11월 23일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58년 입단
-1962년 도일(渡日)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생(63년 귀국)
-1965년 제10기 국수전 우승 후 15기까지 6연패
-1974년 제1기 왕위전 우승 후 7연패(통산 8회 우승) 등 통산 30회 우승
-1983년 九단 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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